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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풍경

고택 운조루

by 산인(山人) 2017. 7. 1.


한마리 새가되다 (운조루)



운조루

운조루  대청마루 아래엔 세 마리 말이 이끌던 마차의 수레바퀴가 덩그마니 놓여 있습니다.

쇠를 전혀 쓰지 않고 순수하게 나무로만 만든 바퀴를 보면,

나무의 힘으로만 버텨냈을 말 세 필의 수고로움과 고단함이 느껴집니다.


사랑채를 지나 내당으로 건너가다 곳간에서 발을 멈춥니다.

곳간에는 여물 끓여내는 아궁이와 직사각형, 원통형의 뒤주 두 개가 있는데 원통형 뒤주는

가난한 동네 사람들이 마음껏 그리고 양심껏 곡식을 퍼갈 수 있도록 마련된 쌀독입니다.


뒤주 아래엔 쌀을 꺼내는 구멍이 있으며 10×15cm 정도의 직사각형 작은 문으로 되어 있고,

반꺾이문이라 수월하게 쌀을 꺼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마개는 누군가 훔쳐가 버려 지금은 구멍만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옛날에 붙여졌을 '타인능해(他人能解 : 다른 사람 누구나 이 마개를 풀 수 있다)'라는 글귀를 보며,

쌀을 꺼내 끼니를 이어갈 수 있도록 가난한 이웃을 배려한 주인 유이주의 따뜻한 성정을 엿봅니다.



운조루 건립시기 1776년(영조52년)

1968년 중요민속자료 제8호 지정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운조루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 되고 우리나라 고택중 두번째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되었으며 , 조선후기 양반가 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있는 몇 안되는 건축물이다 .


운조루는 대구출신이며 당시 낙안부사였던 류이주가 건축했다

1776년 상량식을 가지고 6년만인 1782년 그가 용천부사로 있을때 완성했다

설계는 본인이 하고 조카 덕호에게 털끝 만큼의 차이가 없도록 짓게 하였다.


류이주는 운조루 터를 닦으면서 (하늘이 이 땅을 아껴두엇던  것으로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린 것)이라고 기쁘하였다 

류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 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歸晩)이라 했으며 그의집을 귀만와(歸晩窩)라고도 불렀다.


여러채가 연결되어 品 자 모양을 갖춘 이 집은 안채, 사량채, 행랑채,누마루채, 및

방마다 당호와 방의 별칭이 붙어 있으나  전체를 일러 "운조루"라 한다.


  



밖에서 본 운조루와 집앞 연못





운조루 입구 대문

1,000원의 입장료를 징수한다


전통을 되살려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운조루 정취의 속내엔 후손의 노력만으로는 꾸려가기 힘겨운

가난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할머니가 음료수를 팔고 입장료를 받으며 생활하는 부귀영화의 뒤통수는 어설프고 민망하지만,

운조루를 지키는 양반가 후손의 자부심과 긍지는 엿볼 수 있는 곳입니다.




운조루 안채

운조루 마당에 들어서면 좌우로 행랑채가 주욱 늘어섰습니다.


오른쪽으로는 하녀용이 7채, 왼쪽으로는 하인용 5채의 행랑채입니다.

영화를 누리던 시절의 아흔아홉 칸 양반가는 이제 낡고 빛이 바랜 본채,

사랑채와 내당의 몇 채만으로 그 명맥을 이어갑니다.




류이주가 중국(위나라) 에 사신으로 다녀오며 가저다 심었다는 위석류 나무 (수령200년)

희귀종인 위석류는 오랜 세월 고목으로 쓰러져 가다 언제부턴가 뿌리에서 싹이 돋아

지금의 모습으로 되살아났다고 전해지며 나무 한 그루 변변치 못한 마당에서 홀로 가빈터를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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